신용회복경험담
논밭일만 열심히 하면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
-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.04.11 15:5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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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도입부: 평범하고 조용했던 시골의 삶
남편과 함께 조용히 농사짓고 살아온 지 20년이 넘습니다. 큰 욕심 없이, 자식 둘 도시에 보내고 나서는 둘이서 밭일 하고, 계절 따라 과일 따고,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왔지요.
농사는 힘들지만, 몸이 성할 때까지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. 쌀값, 비료값 올라가는 건 늘 있었던 일이었고, 그마저도 꿋꿋하게 이겨냈습니다. 그런데, ‘은퇴 준비도 해야 한다’, ‘자식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’는 생각이 들면서, 조금이라도 여유 자금을 불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.
그게 시작이었습니다.
2. 전개: 투자 한 번에 무너진 신용
지인에게 소개받은 부동산 투자였습니다. 수도권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분양권이었고, “입주 전에만 팔면 수천만 원 차익이 난다”는 말에 혹했습니다. 농협 대출, 저축은행 대출, 은행 신용대출까지 끌어모아 1억 7천만 원 정도를 투자했습니다.
처음엔 진짜 집값이 조금씩 오르기도 했습니다. 하지만 금리 인상과 함께 부동산 시장이 꺾이기 시작하더니, 결국 계약 해지 수순을 밟게 됐고, 그 과정에서 위약금과 이자만 덩그러니 남게 됐습니다.
한 달에 들어오는 수입은 계절 따라 다르지만 평균 120만 원 정도. 그런데 대출이자만 월 80~90만 원씩 나가니 감당이 안 되더군요. 결국 3년 안에 모든 대출이 연체 상태가 됐고, 신용불량자 딱지가 붙었습니다.
3. 위기: 진짜로 무너졌던 순간
결정적으로 마음이 무너졌던 건,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는데 축의금 한 푼 못 보낼 상황이 되면서였습니다. 아들에게 사정을 숨기고 싶은데, 이미 제 이름으로 된 통장, 신용카드 다 정지됐다는 걸 알고 있었더라고요.
“엄마 괜찮아. 나중에 다시 편해지면 돼.” 그 말을 듣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. 그제야 ‘이렇게 버티는 건 방법이 아니구나’ 싶었습니다.
처음엔 개인회생이라는 말조차 낯설었고, 부끄럽기도 했습니다.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,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진행 중이더군요. “창피할 거 없어. 다시 살아야지.” 그 말에 용기를 내 상담을 받게 됐습니다.
4. 해결: 개인회생이라는 새 길
상담부터 법원 인가까지는 약 5개월이 걸렸습니다. 농사일 하면서 서류 챙기는 것도 벅찼지만, 꾸준히 소득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고, 은행 거래 내역, 투자 계약서 등도 제출했습니다.
법원에서는 제 수입 수준을 고려해서 월 28만 원씩 3년간 갚는 변제계획안을 인가해줬습니다. 그 순간,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더군요. 물론 법원 출석도 처음이고, 판사님 앞에 서는 건 떨렸지만, “성실히 변제하시면 채무는 모두 면책됩니다”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.
지금은 변제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어갑니다. 매달 잊지 않고 납부하고 있고, 더는 연체 전화에 놀랄 일도 없습니다. 비록 여유롭진 않아도, 정직하게 벌어 조금씩 빚을 갚고 있다는 게 저 자신에게 위로가 됩니다.
5. 결말: 희망은 밭에서 다시 자라고 있습니다
이제는 과욕 부리지 않고, 농사일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. 자식들한테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고,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.
올해는 비닐하우스 하나 더 늘려볼 생각입니다. 직접 기른 작물을 택배로 판매하는 방법도 배우고 있어요. 그동안은 실패의 무게에 눌려 살았다면, 이제는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.
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저처럼 잘못된 선택으로 힘든 분이 계시다면, 꼭 말해드리고 싶어요.
개인회생은 끝이 아니라,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제도입니다. 창피해하지 마세요. 누구에게나 실수는 있을 수 있고, 중요한 건 ‘포기하지 않는 마음’입니다.
필요하시면 이 이야기를 블로그용, 카드뉴스용, 혹은 짧은 영상 스크립트로도 각색해드릴 수 있습니다. 언제든지 말씀 주세요!